나는 내 감정을 숨기는 데에 익숙한 사람이다. 내게 감정이란건 존재해봐야 하등 쓸모가 없는 것은 물론 오히려 일에 방해가 되는 불편하기 짝이 없으니까. 그래서 언제고 나는 내 감정을 외면해왔다. 이런 내게 감정을 숨기지 않고 느낀 바를 솔직하게 직구로 던져오는 당신같은 존재는 솔직히 신기했다. 참 알기 쉬운 사람. 어쩌면 세상에 대해 숨길게 없다는 뜻일지도 모르겠군. 그게 당신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우리는 그저 우연히 사건에 휘말려 만나게 된 것 뿐이었고, 일이 끝나면 자연히 만날 일이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으니까.
생각보다 우리의 연은 길었다. 당신은 솔직해보이는 모습 뒤로 생각보다 많은 것을 숨기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런 당신에게 휘말려 나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흘려버렸다. 실수했단 것을 눈치챘을 땐 이미 많은 시간이 흘러버린 뒤였다. 내가 너무 허술했구나.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당신은 인간으로써 꽤 좋은 사람이었다. 기왕 이렇게 되어버린 거 적당히 이정도 관계를 유지하면서 지내자. 더이상 가까이가지 않되 멀지도 않은 관계를 유지하자. 그렇게 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당신이 내게 고백해오기 전까지는.
좋아해. 나랑 사귀자. 정말이지 꾸밈 하나없는 고백이었다. 이걸 어떻게 쳐내야 할까. 찰나의 순간동안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평소보다도 반짝거리는 눈동자가 나를 향해 있었다. 좋아요. 나도 모르던 내 감정의 파편이 멋대로 새어나왔다. 마치 뜨거운 불에 실수로 손을 가져다 댄 것 마냥 내 대답에 나 스스로가 화들짝 놀랐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신나서 떠들고 있는 당신에게 싫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시무룩한 모습은 당신과 어울리지 않으니까. 그렇다면 짧은 순간동안 가볍게 이 관계를 유지하자. 그러도록 하자. 나 자신과 타협하기로 했다. 깨닫지도 못한 나의 한 조각이 처음으로 사욕을 챙겼다. 단 한 번도 꿈꾼 적 없는 행복을 추구하려 했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것, 그것이 내가 당신과 나 사이에 그은 최소한의 선이었다. 전화 통화를 해도, 함께 걸을 때도, 당신을 안고 있을 때 조차도 그 어느 순간도 나는 당신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분명 그 괴리를 당신 역시도 알고 있었겠지. 말을 해버리면 인정해야 할 것 같아서, 주체할 수 없게 될 것 같아서, 당신이 나의 약점이 될 것만 같아서. 수만번 입 밖으로 나오려는 그 말을 쓰게 삼키곤 했다.
차라리 말을 해 흘려보내는게 나았을까, 쌓이고 쌓인 나의 감정은 내 안에서 출렁이더니 이윽고 그를 버티지 못하고 넘쳐흘러 나를 가라앉혔다. 숨조차 쉴 수 없게 되어버린 이 순간이 와서야 인정한다.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그러니 우리는 이곳에서 끝내야 한다고. 처음부터 이랬어야만 했다. 내 욕심이 언젠가 이런 결과를 가져올 것을 알고 있었는데도, 나는.
자고 있는 당신의 손을 잡고 속삭인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하고 있어요. 사랑해요. 마지막이 되어서야 나는 당신에게 이야기한다.
몇 안되는 내 물건을 들고 집을 나섰다. 내 흔적을 전부 지워버렸다. 아침이 되면 당신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을까. 어느쪽이든 내가 만들고싶지 않았던 무언가임은 자명하리라.
설령 이번 생이 아니라도 좋으니, 부디 우리에게 다음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를.
말이라는 것은 상당한 무게를 가진다. 그리고 나는 그 무게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 나는 당신을 평생 사랑할 자신도, 쭉 함께 있어줄 자신도 없어. 그러니 그런 말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당신도 분명 눈치챘겠지.